안중근 기념관 할빈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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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항일 영웅 안중근 렬사 기념관 할빈역에 섰다!

중국인민의 존경하는 주은래총리께서는 일찍 <중조(중한) 량국인민이 힘을 합쳐  항일투쟁을 시작한것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한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하셨다.

1879년 안중근은  조선 황해남도에서 탄생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할빈역에서 안중근은 권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우두머리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그 20분후 이등박문은 귀신이 되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료녕성 려순감옥에서 안중근을 살해하였다. 



(이하 中文 新华网에서 발취 번역)
1879년 조선황해남도 해주에서 출생한 안중근은 조선반도 근대력사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은 19세기 중엽부터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해서 선후로 조선을 삼키고 중국동북을 강점하고 이어 전 중국을 침략하였다.

1894년 갑오전쟁후 일본은 침략을 더욱 다그쳐 조선반도를 삼켰다. 안중근은 학교를 꾸려 애국계몽운동을 하다가 더는 참지 못하고 붓대를 던지고 중국 동북과 로씨야 원동지구에서 반일무장운동에 투신하였다.

1897년 조선왕조는 <대한제국>(大韩帝国)으로 국호를 고쳤다. 1905년 일본은 강박적으로 대한제국과 <일한보호조약>을 체결하고 서울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전 총리대신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초대 총독으로 되였다.

1909년 일본정부는  일로전쟁에서 승리한 유리한 형세를 리용하여 이등박문을 할빈에 파견하여 로씨야 재정대신과 조선반도, 중국침략 등 문제를 상담하게 하였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할빈에 온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해삼위 <대동공보>신문사 주필 리강을 찾아서 그 소문의 확실성을 알아냈다. 안중근은 이것은 더 없는 좋은 기회라고 인정하고 이 기회에 안중근을 사살하여 세계에 일본의 침략야심을 폭로하려고 결심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새벽 권총을 검사하고 준비를 하였다. 오전 7시 마차에 앉아 할빈역전에 가서 일본교민들속에 끼워 역전 대합실에 들어갔다. 오전 9시 이등박문을 태운 렬차가 역에 들어섰다.  로씨야 재무대신은 렬차에 올라가 영접하였다. 약 20분후 이등박문은 로씨야 재무대신과 같이 렬차에서 내려 열병대를 검렬하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홈에 나가 로씨야 의장대의 뒤에 섰다. 9시 30분 이등박문이 로씨야 의장대의 앞에 왔을 때 안중군은 로씨야 군인들과 의장대를 제치고 들어가 이등박문에게 권총을 겨누고 3발을 발사하였다. 이등박문이 쓰러지자 일본 총령사 등 3명에게 련속 총을 쏘았다.

이등박문은 신속한 구급을 거쳤으나 20분 후에 숨이 완전히 끊어졌다.

밤 11시좌우에 로씨야 당국은 안중근을 할빈의 일본총령사관에 넘겨주었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뉴스는 세계를 진감하였고 각국 신문의 특대 뉴스로 되였다.

안중근은 11월 1일 려순감옥에 압송되였다.

일본 외무성은 12월 2일 려순고등법원 원장에게 안중근을 극형에 처할 밀령을 내렸다.

안중근은 마지막 유언에서 <내가 죽은후 나의 유골을 할빈공원 옆에 묻어달라, 조국이 주권을 회복했을 때 나의 유골을 조국땅에  옴겨 묻어달라. 대한이 독립하면 난 천국에서 환호하며 목청껏 만세를 부를것이다>고 하였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6차례 재판을 열었는데 법원당국은 로씨야변호사도 영국변호사도 대한제국변호사도 변호를 못하게 하고 일본관방 변호사에게 변호를 하게 하였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등박문의 조선반도 침략 및 동아세아 평화파괴 등 15가지 죄행을 폭로하였다. 안중근은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것은 한국독립전쟁의 일부분으로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것이다>고 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려순감옥에서 안중근은 일본침략자들에게 살해되였다.

안중근이 살해된후 그의 두 동생은 안중근의 유언대로 안중근을 할빈공원에 묻기 위해 일본 당국에 유체를 돌려줄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당국은 거절하였으며 비밀리에 매장했다.

근년에 중국, 한국, 조선 등 인사들이 안중근의 유골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중국인민의 존경하는 주은래총리께서는 일찍 <중조(중한) 량국인민이 힘을 합쳐  항일투쟁을 시작한것은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격살한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하셨다.











中國 매체 '안중근 기념관' 주요소식으로 보도

누리꾼 "진정한 의인, 진정한 남자" 호평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중국이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을 기리는 기념관을 하얼빈역에 설치하고 19일 개관식을 연 가운데 중국언론들도 이 소식을 비중 있게 소개하며 관심을 보였다.

신화통신은 이날 오후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안중근 기념관이 하얼빈에서 개관, 그는 (일찍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제목으로 개관소식을 기념관 내에 설치된 안 의사의 흉상사진과 함께 속보 형태로 보도했다.

신화통신은 "안중근은 조선반도(한반도) 근대역사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며 "안중근은 갑오전쟁(청일전쟁) 후 일본이 침략을 강화하고 한반도 병탄의 속도를 높이던 와중에 학교설립을 통해 애국문화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나중에는 붓을 던지고 종군했다"고 설명했다.

또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반일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고 덧붙였다.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는 이 신화통신 기사를 주요뉴스 중 하나로 첫 화면에 노출했다.

왕이(網易), 신랑(新浪) 등 주요포털사이트와 광명망(光明網) 등도 주요 뉴스사이트들도 안 의사의 생애 등과 함께 기념관 개관 소식을 자세히 전했다.

중국언론들은 그동안 한중 양국이 추진해온 안 의사 기념비 설치사업에 대해서도 "안 의사는 '한국 민족의 영웅'"이라고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기념관 설치 소식을 접한 중국 누리꾼들은 "반일인사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안중근은) 진정한 의사, 진정한 남자다. 중국과 한국에 이런 사람들이 더 있다면 일본이 어떻게 감히 제멋대로 굴 수 있겠는가"라며 환영했다.
2014/01/19 18:14 송고



<안중근 의사 발자취 곳곳에 남아있는 하얼빈>

(하얼빈=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 19일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하얼빈 곳곳에 남아있는 안 의사의 발자취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얼빈은 매년 겨울 20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리는 세계 3대 겨울축제인 '하얼빈 빙설축제'로 유명한 도시지만, 한국인에게는 안 의사가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장소로 더 친숙하다.

이번 기념관 개관은 안 의사의 의거 장소에 표지석을 세워 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청에 중국 정부가 기념관 개관이라는 '통 큰 선물'로 화답한 것이지만 하얼빈시 당국도 그동안 안 의사의 유적과 유물 관리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안 의사가 거사를 치르기 사흘 전 들렀던 자오린(兆麟)공원(옛 하얼빈공원)에는 2006년에 세워진 안 의사의 유묵비(遺墨碑)가 있다.

안 의사가 의거를 기념해 1.26m 높이로 만들어진 유묵비의 앞면에는 '청초당(靑草塘)'이, 뒷면에는 '연지(硯池)'라는 글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에도 별도의 '안중근 전시실'이 마련돼 안 의사의 흔적이 담긴 각종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실에는 1920년 안 의사 유족이 상하이(上海)에서 촬영한 사진 등 관련 사진 90여점과 안 의사의 유묵 8점, 쑨원(孫文) 등 중국 주요인사들의 안 의사 추모글 12점 등 110여점의 사진과 문헌자료 등이 전시돼 있다.

중국이 이처럼 다른 나라의 영웅인 안 의사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거 중국의 지도자들이 극찬할 만큼 중국인의 가슴속에도 안 의사가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총리'로 존경받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40여년 전 안 의사의 거사에 대해 "중국 인민의 항일투쟁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격살로부터 시작됐다"며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 것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도 중국인 중에는 항일투쟁이란 공통분모를 가진 한국이 배출한 안 의사를 영웅으로 평가하고 존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얼빈시는 2006년부터는 한국주간행사를 해마다 개최하며 양국 간 교류 확대와 우호 증진에도 앞장서고 있다.
2014/01/19 23:14 송고



<'동양평화의 창의자 안중근' 업적•사상 망라>

100여㎡ 규모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한국어 설명도 병행

(하얼빈•서울=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차대운 기자 = 중국 정부가 19일 개관한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역사 내 플랫폼 바로 옆에 있는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해 만들어졌다.

기념관 입구는 하얼빈역의 옛 입구 모습을 축소한 모습으로 꾸며졌다.

입구 외부 벽면에는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시간에 맞춘 '오전 9시30분'에 고정된 대형 벽시계가 걸렸다.
안 의사의 의거를 영원토록 기억하자는 의미로 보이는 이 장식에서 이번 기념관 설치를 준비한 중국 측의 세심함을 읽을 수 있다.

이날 오후부터 일반에 무료로 개방된 하얼빈역 안 의사 기념관의 규모는 100여㎡에 달한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입구 바로 옆에 배치된 안 의사의 흉상과 동양평화론에 대한 소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안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에 대해 기념관 측은 "당시 안 의사의 구상은 특정국가의 이익을 벗어나 지역경제공동체와 블록경제론, 공동방어론을 주장한 것이었다"는 해석을 달아놨다.

기념관에는 "안중근은 조선반도 근대사에 저명한 독립운동가로, 1879년 9월 2일 현재의 조선(북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났다"는 설명을 시작으로 안 의사의 가족관계와 가정교육, 신앙 등 유년기에 대한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이어진 양쪽 벽에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제 침략기의 시대적 상황과 안 의사가 의거를 준비한 '하얼빈에서의 11일 행적'을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곁들였다.

또 의병 투쟁과 단지동맹, 최후의 유언 등 안 의사가 일제에 의해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평생에 걸친 업적과 사상을 조명한 각종 사진과 사료가 전시됐다.

이들 전시물은 대부분 중국어와 한국어로 병기돼 있다.

중국 측은 기념관 안의 잘 보이는 벽면에 '동양평화의 창의자'라는 설명을 단 안 의사의 사진을 걸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기념관 안에서는 관람객들이 통유리창 너머로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장소를 잘 볼 수 있다.

그동안 처음 방문한 이는 무슨 뜻인지 모를 삼각형 모양의 타일만이 플랫폼 바닥에 깔렸던 저격 현장도 눈에 띄게 변했다.

중국은 이번에 안 의사 기념관을 새로 설치하면서 저격 현장 위에 "안 의사 이토 히로부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를 내걸었다.

우리 외교부 당국자는 "저격은 플랫폼에서 했는데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표지석을 세우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며 "대신 잘 보이는 곳에 기념관을 설치하고 (바닥) 표지 위에 '격살' 설명을 달아 놓고 조명까지 설치했다"고 말했다.

기념관의 관람시간은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로 결정됐다.

기념관은 세계 3대 겨울축제로 꼽히는 하얼빈 빙설축제를 즐기려는 내외국인 관광객을 비롯해 시내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하얼빈역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앞으로 귀중한 역사교육장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념관 관계자는 "많은 이들이 안 의사 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도록 매주 월요일만 휴관하고 연중 무료로 개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4/01/19 20:08 송고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이토 히로부미 저격장소 앞 귀빈실 개조해 기념관 설치

中, 표시석 설치 朴대통령 요청에 기념관 건립 화답

(하얼빈•서울=연합뉴스) 신민재 특파원 차대운 기자 =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역에 19일 안 의사의 의거를 기리는 기념관이 전격 개관했다.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은 이날 오후 2시(현지시간)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식을 갖고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기념관 공사는 그동안 철저히 비밀에 붙여진채 진행됐으며, 이날 개관식에는 헤이룽장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 측 인사만 30여명이 참석했다.

안 의사 기념관은 의거 현장인 하얼빈역 1번 플랫폼 바로 앞에 있던 귀빈용 대합실 일부를 개조, 100여㎡ 크기로 만들어졌다.
기념관 내부에서는 참관자들이 유리창 너머로 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있는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현장을 볼 수 있다.

기념관에는 안 의사의 흉상을 비롯해 그의 일생과 사상을 담은 사진, 사료 등이 전시됐고 일부에는 한국어 설명도 붙여졌다.

아울러 중국은 그동안 플랫폼 바닥에 간단한 표시만 있던 안 의사 저격 현장 천장에는 "안 의사 이등박문 격살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이라는 설명 문구를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다.

이날 문을 연 안 의사 기념관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일반에 무료로 개방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외교부는 "정부는 한중 양국 국민들로부터 공히 존경받는 안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의거 현장에 설치된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며 이를 계기로 동북아 지역 국가들이 안중근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면서 올바른 역사인식에 기초하여 진정한 평화•협력의 길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안 의사가 한중 양국민이 공히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인 만큼 하얼빈역의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시 주석은 유관 기관에 검토를 지시했다.

한중 양국은 이후 물밑에서 관련 협의를 벌여 온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의 의거 현장 표지석 설치 요청을 받은 중국 정부는 표지석 설치 수준을 넘어 기념관을 건립으로 화답했다.

중국 외교부는 지난해 11월 브리핑에서 안 의사에 대한 평가를 요구받고 "안중근 의사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저명한 항일의사"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안 의사 기념관 건립은 역사 인식 문제로 일본과 갈등 관계에 있는 한중 양국의 공동 대응 성격도 띠어 일본의 반발도 예상된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지난해 11월 안 의사 표지석 설치 문제와 관련, 안 의사가 범죄자라는 주장을 펴 우리 정부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잠입,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던 이토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같은 해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됐으며 이듬해 2월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26일 순국했다.
2014/01/19 18:18 송고





安重根纪念馆在哈尔滨开馆 曾击毙日本首相伊藤博文

2014-01-19 14:50 来源:新华社

安重根义士纪念馆19日在哈尔滨开馆。安重根是朝鲜半岛近代史上著名独立运动家。甲午战争后,日本加快侵略、吞并朝鲜半岛的步伐。安重根先是通过办学开展爱国文化启蒙运动,后又弃笔从戎,到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投身反日义兵运动。安重根曾击毙日本的伊藤博文。





安重根义士纪念馆在哈尔滨开馆

2014年01月19日 15:25:33 来源: 新华网
 
新华网哈尔滨1月19日电 19日下午,位于哈尔滨火车站的安重根义士纪念馆举行开馆仪式。该纪念馆包括安重根义士事迹陈列室、安重根击毙伊藤博文地点标识等,由哈尔滨市政府和铁路部门出资建立,哈尔滨市有关部门和哈尔滨铁路局负责管理。
   
安重根1879年出生于今朝鲜黄海南道海州地区,是朝鲜半岛近代史上著名的独立运动家。1894年甲午战争后,日本加快侵略、吞并朝鲜半岛的步伐。安重根先是通过办学开展爱国文化启蒙运动,后又弃笔从戎,到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投身反日义兵运动。
   
1909年10月,安重根在哈尔滨火车站击毙日本枢密院议长、首任“韩国统监”伊藤博文。安重根在现场被捕,并于次年3月在旅顺监狱被日本占领当局秘密处死。





伫立正视历史 转身昭示和平——安重根义士纪念馆开馆侧记

2014年01月19日 15:44:03 来源: 新华网
 
新华网哈尔滨1月19日电(记者辛林霞、刘景洋、王子辰)哈尔滨火车站一面黄色门廊上,永远定格在9点30分的钟表悬挂正中。这是一个震惊世界的历史时刻。
   
1909年10月26日9时30分,来自朝鲜半岛的抗日义士安重根在这里击毙时任日本枢密院议长伊藤博文。
   
一百多年后,哈尔滨为安重根义士立馆予以纪念。
 
 沉重的古铜色大门带人进入穿越世纪的时光隧道。这座由候车室改造的纪念馆,外墙复原了100多年前哈尔滨火车站的旧貌。
 
 纪念馆的一头,两扇落地窗直面火车站台,历史的车轮匆匆走过,但轰鸣的汽笛声和醒目的标志仍提醒人们,这里曾有改变历史进程的7声枪响。
  
开馆前夜,负责筹建该馆的徐鹤东独自在窗前伫立良久。“我们很少为一个外国人建馆。今天并非要挑起争端,而是希望各国能正视历史,共谋和平。”身为哈尔滨市文化和新闻出版局副局长的他沉重地说。
  
在中国,这座100多平方米的纪念馆算不上宏伟,却极具冲击力,将人们带回一段侵略与抗争的历史现场。
   
从通过办学开展爱国文化启蒙运动,到弃笔从戎到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投身反日义兵运动,展馆对安重根的家庭、个人经历、击毙伊藤博文经过进行了详尽的图文展示。
 
 玻璃窗外的站台上,两个相距不过五步的位置被标记出来,上面悬挂着“安重根击毙伊藤博文事件发生地”。一位参观者在留言本上写道:穿梭的人流匆匆走过,历史与现实在眼前叠影,正是义士壮举换来今日和平。
  
纪念馆开幕也引来不少韩国游客。韩亚航空哈尔滨代表处总经理郑喜善专门带12岁的儿子来纪念馆参观。他说,要让孩子记住这段历史。
  
韩国《东亚日报》驻华记者高其呈专门从北京赶来。他说,纪念安重根义士非常有意义、非常重要,“我要感谢中国政府,并将这一消息通过报道告诉国内。”
 
 同样引人注目的是,展馆中间一面墙上,印有墨色掌印的一排书法,这是安重根狱中所作。他于1909年2月7日切断无名指一个关节,断指发誓“复大韩独立”,断指掌印是他的独特印章,落款于书法之后,穿过百年历史,依然给人震撼。
   
据介绍,安重根纪念展览2006年就在当地朝鲜民族艺术馆设立,此次由哈尔滨市政府部门出资,搬到事发地向中外游客开放。一些展出的资料从香港和海外搜集而来,安重根本人的一些遗物目前大多在日方手中。
   
黑龙江省政府副省长孙尧在开馆仪式上说,在一个多世纪的历史长河中,安重根不断被人们追思和怀念,我们在这里建立安重根义士纪念馆,旨在让人们牢记历史,珍惜和平,反思过去,展望未来。
 
 转身走出纪念馆,一个和平鸽口衔橄榄枝围成一个象征地球的圆形图案展现在面前,落款是2014年1月19日。图案的作者孔令发说,我们还原历史,反对侵略,倡导和平,这才是追忆安重根义士的重要意义。
   
哈尔滨火车站始建于1899年,是中国北部最重要的铁路枢纽之一。据预计,仅在2014年春节期间,这里就将发送旅客超过1000万人次。安重根义士纪念馆目前免费对公众开放。




安重根简介及击毙伊藤博文始末

2014年01月19日 15:25:32 来源: 新华网

新华网哈尔滨1月19日电 安重根,1879年出生于今朝鲜黄海南道海州地区,是朝鲜半岛近代史上著名的独立运动家。
   
1897年朝鲜王朝改国号为“大韩帝国”。1905年日本强迫“大韩帝国”签订《日韩保护条约》(史称《乙巳条约》),在汉城(今韩国首尔)设立“统监府”,前首相伊藤博文首任“统监”。
   
1909年,日本政府利用日俄战争中获胜的有利形势,派伊藤博文到哈尔滨,与俄国财政大臣可可夫切夫商谈有关吞并朝鲜半岛、进一步干涉中国内政、划分日俄在中国东北的势力范围等事宜。安重根认为这是一个天赐良机,决心利用这次机会击毙伊藤博文,向世界揭露日本的侵略野心。
   
1909年10月26日上午9时整,伊藤博文乘坐的专列进站,可可夫切夫上车迎接,约20分钟后,伊藤博文在可可夫切夫的陪同下走下火车,开始检阅欢迎队伍。安重根走进站台,站在俄国仪仗队后面。
   
9时30分,伊藤博文走到俄国仪仗队前,距安重根10步左右时,安重根穿过俄国军人空隙,冲过仪仗队,相距伊藤博文五步左右,拔出手枪对准伊藤博文连发三枪。三发子弹命中伊藤博文的胸部、腹部,伊藤博文扑倒在地。20分钟后,伊藤博文命绝。
 
 随后,他又射伤日本驻哈总领事川上俊彦、满铁理事田中清次郎和秘书官森泰二郎三人。11月1日,安重根等9名涉案者被押送至旅顺监狱,3日到达旅顺。
   
在1910年2月7日到14日期间,共进行了六次庭审。法院当局背弃允约,拒绝俄国律师米哈伊洛夫、英国律师道格拉斯及“大韩帝国”律师安秉瓒等出庭辩护,只允许日本官方选定的日本律师“辩护”。
   
安重根在法庭上阐述了义举的正当理由和目的,揭露了伊藤博文侵略朝鲜半岛,破坏东亚和平的15条罪状。安重根在公判庭上陈述:“我杀伊藤博文是韩国独立战争的一部分,而我站在日本法庭,是因为战争中失败当俘虏所致,我不是以个人资格干此事的,而是以韩国义兵参谋中将的身份,为祖国的独立和东洋的和平而做的。所以,我应当根据万国公法来处理。”
   
1910年3月26日上午10时,在旅顺监狱处刑室,安重根被处以绞刑。





安重根:击毙伊藤博文 枪响震惊世界

2014年01月19日 22:11:33 来源: 新华网

新华网哈尔滨1月19日新媒体专电(“中国网事”记者刘景洋 辛林霞 王子辰)安重根,1879年出生于今朝鲜黄海南道海州地区,是朝鲜半岛近代史上著名的独立运动家。日本自十九世纪中叶走上军国主义道路后,逐渐形成了吞并朝鲜半岛,侵占中国东北、征服中国、进而称霸亚洲的“大陆政策”。
   
1894年甲午战争后,日本加快侵略、吞并朝鲜半岛的步伐。安重根先是通过办学开展爱国文化启蒙运动,后又弃笔从戎,到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投身反日义兵运动。
   
1897年朝鲜王朝改国号为“大韩帝国”。1905年日本强迫“大韩帝国”签订《日韩保护条约》(史称《乙巳条约》),在汉城(今韩国首尔)设立“统监府”,前首相伊藤博文首任“统监”。
   
1909年,日本政府利用日俄战争中获胜的有利形势,派伊藤博文到哈尔滨,与俄国财政大臣可可夫切夫商谈有关吞并朝鲜半岛、进一步干涉中国内政、划分日俄在中国东北的势力范围等事宜。安重根听到伊藤博文准备到哈尔滨的消息后,立即到海参崴《大东共报》社找到主编李刚,确认了这个消息。安重根认为这是一个天赐良机,决心利用这次机会击毙伊藤博文,向世界揭露日本的侵略野心。
   
1909年10月26日早晨,安重根检查了勃朗宁F-1900式手枪,将弹头刻成十字花的子弹上膛,上午7时离开金成伯家乘坐马车来到哈尔滨火车站,随日本侨民进入车站候车室。上午9时整,伊藤博文乘坐的专列进站,可可夫切夫上车迎接。约20分钟后,伊藤博文在可可夫切夫的陪同下走下火车,开始检阅欢迎队伍。
   
安重根走进站台,站在俄国仪仗队后面,9时30分,伊藤博文走到俄国仪仗队前,距安重根10步左右时,安重根穿过俄国军人空隙,冲过仪仗队,相距伊藤博文五步左右,拔出手枪对准伊藤博文连发三枪。三发子弹命中伊藤博文的胸部、腹部,伊藤博文扑倒在地。
 
 随后,他又射伤日本驻哈总领事川上俊彦、满铁理事田中清次郎和秘书官森泰二郎三人后被捕。
 
 随行医生迅速把伊藤博文抬到车上抢救,20分钟后,伊藤博文命绝。
 
 晚11时左右,俄国当局把安重根引渡给了日本驻哈尔滨总领事馆。此后至11月1日,安重根被监禁在日本驻哈尔滨总领事馆(今花园小学)的地下室。安重根击毙伊藤博文的消息震惊了世界,世界各国的媒体刊登了大量报道和评论。
   
11月1日,安重根等9名涉案者被押送至旅顺监狱,3日到达旅顺。
   
日本外务省于12月2日下达了将“安重根处以极刑”的密令,并把旅顺高等法院院长平石召回东京,命令他保证执行。
   
安重根在最后的遗言中曾说:“我死之后,希望把我的遗骨埋在哈尔滨公园旁,等我们恢复主权后返葬到故国。当大韩独立的消息传到天国时,我一定会欢呼,高唱万岁。”
   
在1910年2月7日到14日期间,共进行了六次庭审。法院当局背弃允约,拒绝俄国律师米哈伊洛夫、英国律师道格拉斯及“大韩帝国”律师安秉瓒等出庭辩护,只允许日本官方选定的日本律师“辩护”。
   
安重根在法庭上阐述了义举的正当理由和目的,揭露了伊藤博文侵略朝鲜半岛,破坏东亚和平的15条罪状。安重根在公判庭上陈述:“我杀伊藤博文是韩国独立战争的一部分,而我站在日本法庭,是因为战争中失败当俘虏所致,我不是以个人资格干此事的,而是以韩国义兵参谋中将的身份,为祖国的独立和东洋的和平而做的。所以,我应当根据万国公法来处理。”
   
1910年3月26日上午10时,在旅顺监狱处刑室,安重根被处以绞刑。安重根就义后,安重根的两个弟弟要求日本政府引渡安重根的遗体,按照安重根的遗愿安葬在哈尔滨公园(今兆麟公园)旁。
   
日本拒绝这一要求,将安重根的遗体秘密埋在旅顺某地。近几年,中、韩、朝人士为寻找安重根的遗骸作了很大努力,但至今没有找到。
   
周恩来总理曾说:“中日甲午战争后,本世纪初,安重根行刺伊藤博文,就在哈尔滨火车站。两国人民共同反对日本帝国主义的斗争就开始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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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 1최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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