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한 연변유학생의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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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3.0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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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글을 쓰기전에 내 자신을 소개하고 싶다.

1978년 화룡출신
1986년 도문으로 이사해갔음.
1991년 연길로 이사해 갔음.
1997년 용정친척집에서 살았음.
2000년 북경에서 공작2년
2002년 일본와서 유학시작
훈춘 안도 석현 팔가자 노투구 먼데까지 조선변경의 남평 로과 숭선에 모두 친척들이 있다.
글고 내 동년도 남평 숭선 로과에서 보냈고
중학시절부터 회억은 연변의 도시의 회억이다.
도시애로 태여났지만 아버지 친척들이 모두 농촌이여서 농촌생활도 해봣다.
마다매집에 가서 감자농사도 해봤고 형따라 시장에 가서 감자장사질도 해봤다.
담배농사 벼농사….농촌일도 농촌애들처럼 못해봤지만 도시애들과 비하면 많이 한축이다.


이렇게 내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목적은 내가 연변이란 고향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립장을 밝히고 싶다.

유치원때화룡은 정말 한족이 적었다.
우리 동네 한족사람이 두집빡에 없었는데 가네는 자기네 한족끼리 놀고 우리 조선족애들과 못놀았다.
아마 모두 합해서 한족이5명내지 7명정도이다…..

粮票란거 나도 본 사람이다. 글고 인민페 낡은것도 ….그때 인민페 50전이 자지색나는돈인데 내 한번 길가에서 주은적이 있다.
그때 50전을 주은거면 아마 지금 중국인민페 200원좌우 주은것과 같다.
정신없이 맛있는거 사먹엇다.
글고 시내인데 똥개들도 많았다. 유치원때 집갈때 큰개들이 있으면 그게 제일 겁났다.
그때는 아스파트길이 없었다.
그때 한개 유치원대반에 적어도 30명정도 있었다는게 내 기억이다….
적어도 화룡에서…



소학교1학년때 삥골한대 값은 2전이고 쐬고한대값은 5전이다.
그런것도 돈이 없어서 못먹었을때이다.
하지만 그때는 모두 빈부차이가 그리크지 않아서 조선족들이 대부분 연변에 많아서 명절이되면 기뻤고 서로 같은 또래들도 많아서 재미잇었다.
길거리옆에 그림책파는 장사군들속에 가서 일전에 하나씩 그림책을 잘 보았다. 그때그림책은 중국식그림책 지금 애들은 모를것이다. A4사이즈의 1/4되는 종이로 된게다.
그때는 누가 쌀개면 누가 쎈가했다.
소학교6학년때 친구들끼리 남자여자관계가 궁금해서 어떻게하면 애기가 생기는가 정말 궁금했다.
그러다가 우리무리중에 제일 쌀개는 놈이 하는말이 남자가 여자배꼽에 자기고추를 넣으면 애기가 생긴다해서 …. 한때 약먹은 닭처럼 정신없이 흥분했다.
그때 두만강이 얼면 조선애들이 강저쪽에서 우리는 강 이쪽에서 재미잇게 놀았다.
그러다가 심심하면 우리가 @야 ….옥씨밥이 맛있나?@하고 먼저 싸움걸게 되고 나중에 서로 돌맹이 뿌릴래기 한것도………
역시 옥시밥을 먹는 놈들이 힘이 잇기는 하다
우리 돌맹이는 겨우 강속에 빠지지만 그놈들이 돌맹이는 내 친구 몇몇을 골터지게 하엿다.
나의 동년 버들방천…
그때 소학교대 우리 반에 학생인수가 50명좌우이다.
그때는 도문에서 조선으로 아줌마들이 보따리 장사하러 잘다녔다.
그래서 조선에서 채색텔레비거나 손목시계를 바꾸어왔다…..
소학교때 학교에서 항상 우리를 데리고 혁명렬사기념비로 데리고 다녔다...
여러가지 결심발표도 시켰고....



초중은 연길에 와서 다녔는데 역시 도문과 달리 사람들의 생각과 관념도 달랐다.
적어도 같은 또래 아들은 도문에서 누가 쌀갰는가 비기였는데 연길에서는 누가 더 공부잘하는가 배기기가 주류였다.
물론쌀깨는것도 유행이였다.
13중이엿는데 7중한족애들과싸움은 항상끝날새가 없었다.
마지막에 우리반 반주임은 탄서기가 맞아서 악이나서 선생님이 책상다리 뜯어서 한족애들때릴러 반급애들을 데리고 나갔다.ㅋㅋ
몇번 한족이들한테 붙잡혀 돈을 빼았긴적이있다.
초중때부터 누구 누구 엄마는 한국에 갔다
누구누구 아버지는 한국에 갔다.
아마 이때부터 한국가는 바람이 불었을것이다.
글고 한국사람한테 많이 사기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
그때 우리 13중에 내또래학년에 10개반이지만 매개반에 학생수가 50명은 넘엇다.
어떤 영어반은 60명 70명정도 애들이 있었다….
영어반은 모두 돈이있거나 공부잘하거나 뒤문이 있는 애들이가는 반이다.
이때는 노래방이 정말 많앗다.
이때 노래방이 연변에서 시작될때이다…..
한국노래가 유행인시절이고 검은고양이 네로 부터 한국노래바람이 불었다….


고중도 연길인데 2중.
그때 고중은 돈받는게 주요사회풍기였다.
시험못치면 돈내고 다녔다.
그때 연변일중은 10반을 모집했는데 2반정도 내놓고 모두 돈을가지고 모집한 애들이였다.
점수가 몇점치이면 5천원
점수가 십몇점차이면 만원
점수가 몇십전차이면 2만원
점수가 넘차하면 돈을 엄마 냈는지 잘모르지만 …..적어도 3만이상이란걸 알았다.
시2중은 얼마돈을 내고 갔는지는 몰겟다.
나는 정상적인 점수로 갔으니….
아는 사람이면 코멘트로 알려주어면한다.

내동생은 내보다 3살차이인데 공부안해서 3중도 돈내고 갔다.
구체적으로 집에 저축을 모두 썼는데 만원좌우썼다.
마침나도 대학시험을 쳤는데 좋은 대학못붙어서 다시 고중일년다니려고했지만 다시다니는데 돈을 5천좌우내라해서 그만두고 대충대학에 입학햇다.
고중때는 연변에 노래방이 정말 흥성한때다 …
노래방쇼제들도 정말 많았다…..
한국영향이 심할때이다…..
고중때 제일 인상깊은것은 모두 같이 모여서 연변대 축구시합볼러간것이다….
지금 연변고중아들은 연변팀의 홈장이란 재미를 모를것이다…
고중은 축구의 시대엿다. 연변축구가 중국에서 이름놓을때엿따.
최은택시대이…..다.



대학은 연변대학인데 …..로실하게 말해서 정말 피쥬대학명태계이다….
잼있게 놀았다는게 그저 인상이고
학비는 그때 일년에 2천원좌우이다.
부모님들은 나와동생의 학비로 인해 많이 고생했다…
모두 월급이형편이이고 한국으로 간적도 없으니 돈이란게 정말 그렇게 바빴다.
졸업은 무사히 했다.
그때 우리반에 학생이 모두 30여명정도인데 절반한족절반조선족이다….
한족은 대부분길림성의 기타지역에서 온 애들이다….
이렇게 자기절로 정리하는 과정에 차츰연변교육이 나태성이 보일것이다….
이때 유일나게 잼있는게 한반애들이 모여서 뽈차고 술먹으로 간거와 왕바에가서 모여서 인터넷유희를 논것이다….


북경에서 가서 일을 할때 연변에서 온 애들이 많았다.
발써 그때 집에 문이 없는 애들은 모두 외지로 나와서 일하러 다녔다.
그래서 북경에서 공부한애들과 외지에서 나온 조선족애들을 모두 합치면 조선족이 꽤나 많았다….
모두 젊은이들이다….

이렇게 적으니 좀 가슴이 아프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글을 적은것은 왜서 우리는 외지에 나와 이런 머슴살이 같은 신세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하는 근본원인을 찾고 싶은것이다……

개혁개방과외국돈벌이는 연변사람들의 의식형태를 개변해서 금전만능으로 되게했고 중국의 일당제현실과결합되어서 이것이 사회의부패성을 추진시켰는데 유감하게 이것이 교육계통에 침투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아주어릴때부터 금전의욕이 남달리 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향떠나 돈벌이 모두 떠난게 아닌가고 생각난다.

누군가 21세기경제추세가 이렇다고 말한다.
모두 대도시집거로 되고 지방경제가 파괴되고 젊은이들이 모두 큰도시로 모여가는게 연변뿐만아니라 일본도 그렇다고 말한다.

또하나의 원인은 셰계의 경제발전의 흐름이 넘빨라서 교육이 경제발전과 탈리되어서 중국의  교육은 우리를 배신했다는말이다.
즉 우리는 조국이 우리한테 배워준 정치적교육으로 고향건설을 유지할능력이 없다.
실제적으로 경제발전을 추진할수 잇는 유용한 기술적인것을 배우지못하고 정치적교육이근원이다.
지금의 IT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돌이켜보면 우리가 배운 교육으로 마음만 있지 능력이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시대의 흐름에 어울려 재차 자신을 충전하지 않으면 안된것이다.
연변도 또한 하루빨리 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발걸음을 맞추지 못하고 옛날의 전통관념과 사상의식으로 다른 연해도시보다 현대화반전속도가 늦은것이 안가고 본다….이게 모두 연변당간부들의 원견성과정책에 관계된다고 본다.
우리조선족은 중국어느도시인구들보다 더 일찍 출국생활했는데 아직까지 이모양인것은
현재정부의 영도능력을 의심해야 할봐다.

아직까지도 주정부에서는 이런데 골을 돌리는게 아니라 새로운 신분증하는데 어떻게하면 시민들의 돈을 많이 받을수 잇를까 하는데 머리를 굴리고 있다.....

교육은 시대의발전에 따라 변화해야하고 정책도 남먼저 발걸음을 내 딛어야 남보다 먼저 부유해질수 잇다.

두만강개발은 내가 초중때때부터 회의를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고 ….
훈춘개발구는 완전히 귀신도시같다.

개관적원인도 있지만 주관적인원인은 우리 조선족의 자기 문화에도 있지 않는가고 본다.
교육이 발전하고 남보다 신생사물을 빨리 인식하는게 좋은 일이지만

허영심만부리고 자기자랑에 정신없고 질투심강하고 자존심이 강하고 허풍치기 잘하고 교만하고 …..
없으면 없는대로 소박하게 사는것이 아니라 …
글고 무슨 일해도 겸손하게 소리없이 하는게 아니라 항상 자기가 뭐 큰일하는것처럼 요란하게 해야 한다.
글고 서로 단합이 안되고 물고 뜯는것도…
쉼터의 글도 많이 읽어보았는데 항상 자기자랑하는글이 많다.


개관원인은 우리 자기자신의 주관원인을 극복하고 모두 뭉쳐서 힘내야 객관원인을 극복할수 잇는것이다.

가슴아프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재번영은 우리 모두가 자기자신의 소질과인식 관념을 개변후 다시 연변에 돌아가서 이끌어야 되는거라고 본다.

하루빨리 돈을 벌고 일본의 우수한 사회질서관념과 문명한도덕 선진적기술을 배우고 연변에가서 우리 후대들의 교육을 이쪽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연변은 영원히 지나간 우리 고향이다.


연변발전에 도움줄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못했고 사람됨됨과 도덕상에서 선진나라에서 교정못잡으면 연변돌아가지 말았으면한다….이런사람은 돌아가도 오히려 조선족이메지에 먹칠이고 조선족사회의건전한 발전에 도움못주고 해를 줄것이다…..


우리 모두 하루빨리 돈도 벌고 건전한 사상과 선진적인사회기풍 글고 교육을 배워가지고 연변돌아가서 잘못된 우리 문화와사회기풍을 바라잡읍시다.

물론 일당제의 영향에 사회의부패기풍은 바로 잡을수 없을수 없지만 사회기풍은 몰라도 우리가 배운 기술을 연변에 가져가서 경제토대만은 바로 잡아주는것도 고향에대한 한개공헌이라고 보는데

돈을가지고 가는것도 좋지만 돈보다 기술을 가지고 가면 더 큰 도움이 아닌가고 보는데….

그러면 기술은 어떤기술일까 물어볼수 잇는데 뭐도 좋다고 보는데….
적어도 일본의 맛잇는 음식만드는 방법도 배워가도 기술이고….
돌아가서 자기 밥벌이 할수 잇는 재간이면 다 기술이에요 ….

여러분 자꾸 방황해하지마십소..
천천히 고쳐갈수빡에 없으꾸마...한개세대만 희생하면 얼마든지 일떠설수 있으꾸마...아버지세대들은 이미 할수있는건 다 해놨으꾸마...나머지는 우리가 이끄는게 아니겟으꾸마?
후에 우리 연변력사에서 70년대태생들의 외국유학영향이 없으면 오늘의 연변발전이 없다는 말을 우리 들을때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겠으꾸마...

우리 다시 힘합쳐서 돌아가서 고향건설합시다.
우리 자식들한테 두번째 연변오동팀전설같은 회억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자식들이 경제상에서 부담없이 축구시합보고 내려와서 같이 맥주건베를 할수 잇는 고향으로……

지저분한 글을 여기서 끝을 맺겟어요….
생각나는대로……적엇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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